영화음악-1960년대 중

닥터 지바고 / Doctor Zhivago 리뷰(Behind The Scenes) + 동영상 모음

김제건 2013. 4. 18. 20:32
닥터 지바고 / Doctor Zhivago 리뷰(Behind The Scenes) + 동영상 모음
1965년/ 공동제작 + 감독: David Lean/주연: Omar Sharif + Julie Christie +
Geraldine Chaplin/음악: Maurice Jarre/ 197분



(한 두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좌우의 이념갈등이
거의 사라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도대체 자국에서 자기가 심혈을 기우려 쓴 소설을 출판조차도
하지 못하고, 또 외국에서 간신히 출판을 한 소설로
그 영광스러운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정권의 압력으로 그 상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그 일로 인해 해외추방의 위기까지 겪었다는 게
도대체 사실로 믿어질까?
하지만 1957년에 이태리에서 처음 출판이 된 소설,
‘닥터 지바고(Il Dottor Zivago)’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Pasternak. 1890-1960, 러시아 모스코바)
에게는
이 모든 것이 (서글픈)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나쁜 점만을 강조하여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었고, 당시의 혁명의 주체이었던 인민들을
중상모략 하였다는 것이
1958년에 있었던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
요지였다지만, 주겠다고 한 노벨상(1958년) 수상은
고사하고, 작가동맹에서도 퇴출 시켰으며,
국외로 추방시키자면서 먹고 사는 길마저 막아버려,
2년 후, 결국 자신이 쓴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지바고 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남의 집에서 병사하도록 만든 그 서슬이
시퍼렀던 사회주의 종주국의 공산당 정권 역시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했던 당시의
그 사람들이 그렇게도 반대하였던 소설, ‘닥터 지바고‘는
1959년, 파스테르나크가 와병중일 때, 의외로 브라질에서
먼저 TV 시리즈(‘Doutor Jivago’)로 방영이 되면서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 그가 죽은 지 5년 후,
1965년에 발표가 된 이 데이빗 린 감독의 대작 영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로 인해서
대부분의 전 세계인들이 알게 되는 명작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서글픈) 역사의 증거물로서
영원히 우리들 곁에 남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경찰이었다가 지금은 장군이 된
예브그라프 지바고
(Yevgraf Zhivago-Alec Guinness, 1914-2000, 영국)

자신의 조카를 찾는 첫 장면이
바로 이 영화의 크나 큰 문을 열고 닫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그 조카(소녀)의 부모인
유리 지바고
(Yuri Zhivago-Omar Sharif, 1932,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라라 안티포바
(Lara Antipova-Julie Christie, 1941, 인도/영국국적)

기구한 운명의 사연들이 소년, 유리 지바고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부터 (회상의 형식으로)
시작이 되는데, 나중에 부인이 되는
토냐(Tonya-Geraldine Chaplin, 1944, 미국 CA)
부모(장인 장모)의 도움으로 커서 의사가 되는 지바고는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리게 된다.
죽은 아버지의 친구로서 홀어머니를 여러모로 지원해주던
빅토르(Victor Komarovsky-Rod Steiger, 1925-2002, 뉴욕) 에게
처녀성을 상실한 17세의 라라는
러시아의 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좌파 대학생,
파샤(Pasha-Tom Courtenay, 1937 영국)
사랑하고 또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이런 와중에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들 주인공 모두를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우랄산맥에 있는) 그라도프(Gradov)에서
소박한 결혼 생활을 하던 라라.
입대한 남편, 파샤를 찾기 위해, 어린 딸, 카차를 남겨두고
종군 간호사로 자원을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군의관인 지바고를 만나
6개월간을 함께 지내며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그만 헤어지게 된다.
한편, 부인, 토냐와 아들, 사샤가 기다리는 모스코바로 돌아온
지바고는 인민위원회가 접수를 하여 13가구가 함께 사는 집에서
(변한) 시류에 적응을 하지 못해 고생을 하다가,
“부르주아의 방종”같다는
그의 시에 대한 악평 때문에 숙청의 대상이 되자,
이복형인 예브그라프의 도움을 받아 우랄 산맥에 위치한 도시,
유리아탄(Yuriatan)인근의 바리키노(Varykin)로 피신을 한다.
(이 때의 10일간의 대륙횡단 열차여행 시퀀스도 이 영화에서
너무나 중요하다/아래 사진.)

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유리아탄의 도서관에서 지바고와 라라를
재회하게 만들고, 토냐에게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마치
두 집 살림을 하듯 왕복을 하던 지바고는 어느 날 갑자기
의사가 필요한 (좌파) 빨치산에 의해 납치가 되면서
또 다시 기나 긴 이별의 시간,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한편, 이 사이에 토냐와 식구들은 빠리로 추방이 되고,
좌파인 적군(赤軍)의 사령관이 된 파샤(Strelnikov 장군)
갑작스런 숙청으로 라라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빨치산 부대를 탈출하여 흰 눈벌판을 걸어서
라라에게 다시 돌아온 지바고는
바리키노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라라를 위한 시집을
집필 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라라를 (평생 그녀를 괴롭혀 온)
빅토르 코마로프스키와 함께 극동으로 또 다시
떠나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얼음 궁전 같은 이층으로 얼른 뛰어가 창문을 깨고
흰 지평선 위로 사라져가는 썰매를 쳐다보던 이때의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인 이 영화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래 사진과 동영상)

1920년,
러시아 내전이 모두 끝나고,
8년의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의 모스코바.
가족이 있는 빠리로 가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에 그냥 남아,
모스코바의 한 병원에서 근무를 하며 건강이 약화된 지바고는
우연히 라라를 길에서 발견하고, 그녀를 급히 뒤쫓아 가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만 길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 1918년11월)
발발하고, 또 전쟁 중이던 1917년의 2월과 10월에 일어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으로 야기된 내전,
즉, 레닌(Lenin. 1870-1924)과 트로츠키(Trotskiy. 1879-1940)가
주도를 하던 ‘적군(Red-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백군(White-우파)’이 싸우던 그 내전(1917-1920)
같은 시대 배경을 참조 하면서 보면
그 우랄 산맥의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 등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 이 대하 드라마는
놀랍게도 바로 비운의 작가,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약 80%) 담겨 있다고 한다.
유태인 중산층 예술가 집안(모스코바) 에서 태어난 파스테르나크.
(화가였던 아버지는 라흐마니노프와 톨스토이와도 친구사이였다는데,
이 톨스토이가 파스테르나크의 생애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
27세의 나이에 첫 시집을 내자마자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지바고 같이 (1930년대의 출판금지 처분 등의)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파스테르나크 자신도 소설에 토냐로 묘사가 된 부인,
지나이다와 함께 살면서,
‘실제의 라라‘ 라고 할 수 있는 여인, 올가(Olga Ivinskaya)
1946년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어 1956년도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이 대하소설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올가는 파스테르나크와의 관계로 인해 두 번씩이나
(대리 처벌로) 감옥에도 갔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 서방 언론과 인터뷰한 기록)
‘Il Dottor Zivago’ 라는 이태리어 제목으로 (1957년에) 출간이
되었던 이 소설은 파스테르나크가 그토록 떠나기 싫어했던
조국에선 고르바초프가 집권을 하고난 1988년에서야
모국어로 정식 출간이 되었다.
(이 영화는 1994년에서야 개봉).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읽고 나서 큰 감명을 받은
데이빗 린(David Lean. 1908-1991, 영국) 감독(卿)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1962)’
촬영을 끝내자마자 곧 바로
다시 (前作과) 같은 팀을 구성해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태리의 명배우, 소피아 로렌의 남편이자
거물 제작자(이 영화의 공동 제작자)인
카를로 폰티(Carlo Ponti. 1912, 이태리)
요구한 소피아 로렌의 라라 역 기용을 그 큰 키 때문에
단번에 거절했었다고 하는데,
토냐가 영화에서 입었던 분홍색 코트도 직접 고르는 등,
아주 세밀한 분야까지 일일이 다 신경을 쓰고,
또 700 쪽 분량의 원작소설을 284쪽으로 각색
(Robert Bolt= 미국 아카데미 각본상) 하는 데만
1년이 걸릴 정도로 모든 작업에 완벽한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1964년12월부터 1965년10월까지 촬영, 같은 해 12월22일 처음 개봉)
혁명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들 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지바고의 러브스토리에 더욱 초점을 맞춘
린 감독의 예상은 적중하여 개봉초기의 평단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제38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비록 감독상과 작품상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 넘겨주었지만,
다른 5개의 상을 휩쓸면서, 데이빗 린 생애의 최고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1991년의 그의 장례식에서도
바로 이 영화대사가 낭송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타악기 주자로 음악을 시작한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 1924-2009. 프랑스 리옹)
데이빗 린 감독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미 1963년에 손을 맞잡고 미국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바
있지만, 3년 후, 이 영화로 또 다시 그 영예를 누리게 된다.
처음엔 지바고가 나올 때만 쓰려고 러시아적 이미지로만
작곡을 한 지바고용 여러 주제음악들이 모두 린 감독의
불합격 통지를 받자, 대신 포커스를 라라에게 맞추고
등산을 하면서 산 정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후,
드디어 오케이 사인을 받은 메인 테마(Main Theme),
일명 ‘라라의 테마(Lara's Theme)’
정말로 유명해 질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훌륭한 영화음악의 걸작이다.
이 테마(Theme)를 기조로 하여 만든
전체 오리지널 스코어(OS) 도 Overture 나 Intermission,
또 Entr'Acte 시간에 별도로 다시 들을 수가 있지만
마치 아주 잘 만든 하나의 교향곡 같은 느낌도 준다.
‘라라의 테마’는 영화가 개봉을 하고 나서,
‘Somewhere My Love’라는 제목으로
Ray Coniff & The Singers 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많이 방송이 되었던 버전)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인기 팝송이 되었다.

* 모리스 자르가 직접 지휘하는 이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OS-약10분) 외:






어린 유리 지바고는 어머니가 죽자,
그녀가 연주하던 삼각형의 악기 하나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평생을 소중히 보관하던 이 악기를 극 후반부에서
극동으로 떠나는 라라에게 주게 된다.
이렇게 줄거리에서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한
‘발라라이카(Balalaika)’라는 이 악기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속 현악기이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도 예브그라프 지바고가 찾던
조카 소녀가 이 악기를 잘 연주한다는 대사가 나오지만,
중요한 장면들에서 여러 번 보여 진다.)




류트(Lute)와도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도
만돌린처럼 연주를 할 수 있는 이 악기를
모리스 자르는 ‘라라의 테마’에 사용을 하면서
음악적으로도 러시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만들었는데,
MGM 오케스트라와의 OST 협연 녹음 때는
할리우드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인들 22명이
자발적인 연주 봉사에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좌파) 학생들이 붉은 기를 들고 봉기를 하는 장면에서
이들이 합창을 하던 ‘마르크스주의 찬가’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촬영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우리가 잘 아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당연히 이 장면은 삭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여러 나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오마 샤리프(Omar Sharif. 1932,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오랜 연기 인생에서 이 닥터 지바고 역 이상의 배역은 또 없다.
그만큼 완벽하게 지바고의 역할을 소화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처음에 조연인 파샤 정도의 역할만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그의 재능을 인정한 린 감독은 곱슬머리를 감추는 가발을
씌우고, 전체 얼굴을 위로 올리는 특수 분장까지 시키면서,
주연인 그에게 감정과 반응을 최대한 절제하는
완전 소극적인 연기(“Nothing To Do”)
주문하고 지도함으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지바고의 명연기를 창조 하였다.
또한 린 감독은 배우보다는 발레리나로서 더욱 유명하였던
채플린의 딸, 당시 20살의 신인,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주인공으로 파격적인 기용을 하였다.
한편, 같은 해의 ‘달링(Darling)‘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는 줄리 크리스티를 ‘진짜 라라‘로 만들며
소피아 로렌의 질투를 유발했지만,
정작 린 감독에게 행운의 부적 같은 존재는
‘콰이 강의 다리(1957)’ 때부터
연속하여 히트하던 린 감독의 대작들을 쭉 함께 해 온
알렉 귀네스(Alec Guinness)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하면 제일 먼저 연상이 되는
그 끝없는 흰 눈의 벌판이 알고 보면 거의 다
눈속임 가짜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지바고와 라라가 잠시 피신을 하기 위해
영화 후반부에 다시 찾은 바리키노의 그 집이
혹한 속에 얼음 궁전같이 보이는 장면 역시도
흰 왁스를 부어 만든 정교한 가짜라는 점과 (아래의 사진)
더군다나 스페인의 섭씨 38도 정도의 무더위 속에서
전체가 희고 흰 그 장면들을 촬영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데
영하 40도의 핀랜드와 스웨덴에서의 잠깐의 촬영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대부분을 스페인의 소리아(Soria)에서
4계절 모두를 찍었다.
또 크렘린 궁과 거리 그리고 전차 레일까지 세밀하게 재현해 낸
세트역시 마드리드 인근의 카닐라스(Canillas)에서 18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John Vox가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 수상),
우리가 알고 있던 것 같이 70mm 수퍼 파나비전이 아니라
그냥 35mm 파나비전으로 촬영을 하였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같은
대작의 계보를 이으면서 한편으로는
벤 허(Ben-Hur.1959),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사운드 오브 뮤직(1965) 같이
초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우리들을 감동케 하였던
이 작품이 개봉이 된 1960년대.
이때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최고 황금기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단관 극장의 크나 큰 화면으로) 영화를
영화답게 제대로 감상하였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러브스토리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
이 작품속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러 분쟁국가에서)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이 영화의 아트 디렉터, 존 복스(John Vox)의 얼마 전의
회고는 상당한 의미의 여운을 21세기에도 전해주고 있다.



* 관련 동영상모음:













Jay. 185번째 영화리뷰/revised Mar.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