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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극장을 만나다

김제건 2023. 11. 4. 09:13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극장을 만나다



낙원상가 4층에 있는 실버영화관.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공연을 하는 장면을 즐기는 것은
옛사람이나 현대인 모두에게 공통된 모습이다.

옛날에는 시장 등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특별한 무대도 없이 즉석에서 공연을 벌였다.

판소리나 남사당놀이 등이 대표적이다.
상설 무대, 약속된 시간에 시작되는 공연에 대한 바람은
근대에 와서 극장의 탄생을 보게 된다.

최초에 생긴 극장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실내 극장 협률사 

협률사(協律社)는 1902년 서울에 세워졌던 최초의 실내 극장이었다.

1902년은 1863년 12월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고종(高宗:1852~1919, 재위 1863~1907)이 재위 40주년을 맞는 의미가 깊은 해였다.
당시의 칭경(稱慶)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은
현재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앞에 세워져 있는
‘고종 어극(御極) 40년 칭경비’와 칭경비를 보관한 건물인 ‘기념비전(紀念碑殿)’이다.
‘기념비전’ 글씨는 순종이 쓴 것이며,
홍예 모양의 돌문에 쓴 ‘만세문(萬歲門)’은 6세의 영친왕 글씨이다.

협률사는 이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실내 공연장을 설립한 것에서 출발하는데,

당시 한성부 야주현(夜珠峴: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설치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주관했던 관청인 봉상시(奉常寺)가 있었는데,
봉상시 건물의 일부를 터서 상설극장을 설립한 것이다.
고대 로마식 원형극장인 콜로세움을 본떠 건물을 사방을 둥그렇게 벽돌로 쌓고,
지붕도 얹었는데, 2천 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다.


세종대로 사거리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한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와 비각인 '기념비전' 전경.




고종 황제 등극 4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기에, 행사 준비를 위하여 전국의 판소리 명창(名唱), 가기(歌妓),
무동(舞童) 170여 명으로 구성된 전속단체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경축 행사를 준비하던 1902년 여름에 전국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행사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협률사는 대중들의 연희(演戲) 공간인 극장으로 변모하였다.

1902년 11월에 협률사(協律司) 소속에서 협률사(協律社)란 독립적인 명칭을 갖게 되었고,
1902년 12월 2일에 창립 공연작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유료 무대공연이었다.

‘소춘대유희’는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才人)들의 곡예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공연으로,
1900년대 초 한성을 방문한 프랑스인 부르다르는
‘한성에는 소춘대라고 불리는 실내극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줄타기 등의 공연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협률사는 1903년, 영화 상영 중 전기 파열로 문을 닫는 등 몇 차례 폐관을 했다가,

1906년 4월 17일 봉상시 부제조였던 이필화(李苾和)가
협률사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06년 4월 25일 문을 닫았다.
이필화는 “지금 소위 협률사라는 것을 누가 주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밤새 유희를 베풀어 남녀가 섞여 음란한 짓을 계속하니
이것이 어찌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망치므로 실로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근심하는 것입니다.
속히 경무청으로 하여금 며칠 안으로 엄금하여
음란하게 만드는 단서를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협률사 건물은 2년 뒤인 1908년에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의미와 근현대 예술정신을 계승한 정동극장 전경


최초로 신연극이 공연된 원각사


1902년 고종 황제 재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 준비를 위해
처음 설치했던 협률사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1906년 고종의 명으로 혁파되었다.
협률사 건물은 1907년 2월부터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전용건물로 사용하였다.

관인구락부는 1907년부터 1908년 7월 20일 원각사(圓覺社)가
승인을 받기 전까지 이용되었는데,
1908년 1월 하순에는 남대문 쪽으로 건물을 이전하였다.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1908년 7월 이인직(李人稙:1862~1916)은
원래 협률사가 있던 건물에 원각사를 개설하였고,
이후 이 건물은 연극을 상연하는 고정 장소로 ‘원각사극장’이라 칭하게 되었다.
현재 광화문 새문안교회 앞 횡단보도에는 ‘협률사, 원각사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로 일했으며,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협률사를 인수하여

원각사로 바꾼 뒤, ‘은세계’를 공연했다.
원각사에서는 처음 2개월 동안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주로 상연하다가 11월 15일 이인직의 작품인 ‘은세계’를 상연하였다.
‘은세계’는 신연극의 효시로 평가를 받지만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씁쓸함을 안긴다.
최초의 신연극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원각사는 한때 휴연(休演) 하였다가,
춘향가’나 ‘수궁가’를 공연하였다.
원각사는 이후 국민회 본부사무소로 사용되었다가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우미관은 1910년에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종로의 양대산맥, 우미관과 단성사

공연이나 연극이 아닌 영화가 처음 상영된 극장은 어디일까?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와 같은 드라마 속 주인공 김두한이 먼저 떠오르는
우미관(優美館)이 바로 그곳이다.
우미관은 1910년에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1910년 일본인에 의해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1915년 우미관으로 개칭되었다.
개관 당시 단성사는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정도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미관에서의 영화 구경은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

모두에게도 버킷 리스트로 인식되었다.
처음에는 활동사진을 보여주다가 서부극, 희극 및 카투샤, 로빈후드 등을
상영하였는데, 변사가 해설을 맡는 무성영화 방식이었다.
1928년에 와서야 최초로 유성영화를 상영한 후
우미관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등을 상영하면서
1945년 해방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과 더불어 주요한 개봉 극장의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제일의 주먹 김두한이 우미관을 거점으로

종로 지역에서 활약했기에,
김두한이 주인공인 영화에는 늘 우미관이 배경 장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우미관은 1959년에 화재로 인해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부터는 소규모 재개봉 극장으로 명맥만 유지되다가
1982년 11월 30일에 폐업하였다.
현재 관철동 15-1번지 원래 우미관의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임을
기념하는 표석이 설치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단성사는 상설 영화관으로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개봉했다.


우미관과 양대산맥을 형성했던 극장 단성사(團成社)는
1907년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 등이 공동 출자하여 종로 3가에 처음 건립되었다.
1917년 일본인 다무라 요시지로에게 매각되었다가,
1918년, 1904년부터 전통 예능 보유 단체인 광무대(光武臺)를 경영하고 있던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로 인정을 받은 ‘의리적 구토’를 개봉하였는데,
10월 27일은 영화의 날로 제정되었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민족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곳도 단성사였다.
단성사는 최근까지 원래의 자리를 지켰던 극장이었으며,
현재에는 ‘단성사 역사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단성사 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물


필자가 대학원 시절을 보낸 1990년대까지도
그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극장이었다.
도시의 번화가 주요 도로마다 화려하게 걸려 있던 극장의 간판은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의 국제극장, 종로 3가의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퇴계로의 대한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명동의 중앙극장 등에 걸린 화려했던 상영 영화의 간판은
극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늘 부추겼다. 

대구만 해도 동성로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던 한일, 아카데미, 제일, 아세아 극장,

만경관의 영화 간판은 학창시절 필자음을 늘 설레게 했다.
복합 영화관의 탄생과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의 변화로 이제
극장은 더이상 도시의 랜드마크 기능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극장이 위치했던 공간에 서면
그때 용돈을 모아 보았던 힘들게 보았던 영화 생각이 난다. 


원본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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